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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phis | 24/09/01 07:34 | 추천 1 | 조회 327

쓰러진 재계의 풍운아.. 신기루처럼 사라진 사하라의 기적, 동아그룹 - 소비더머니 +206 [2]

SLR클럽 원문링크 m.slrclub.com/v/hot_article/1280532







그냥 우연히 유튭 돌아다니다가 보게된 영상인데

영상에 달린 댓글 보니 제가 알던 사실과는 너무나도 달라서 가져왔습니다. ㄷㄷㄷㄷㄷ

그저 부실공사라고만 생각했는데.. 원인이 따로 있었네요.

아래는 댓글 퍼왔습니다.

제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알아보는게 귀찮기도 하고 ㄷㄷㄷㄷㄷ)

이런 의견도 있다고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만약에 아래 내용이 사실이라면 정말 억울한....




성수대교는 동아건설이 1977년 4월에 착공하여 2년 8개월만인 1979년 12월 완공한 한강의 열 번째 다리입니다. 총중량 32.4톤까지 통과할 수 있는 2등급(DB-18) 교량으로서 게르버 트러스(Gerber Truss)형 철구조물 다리로 설계되었고, 발주처는 서울시이고, 설계사는 대한컨설턴트였습니다. 이 다리는 준공된 지 15년째 (정확히 14년 10개월) 되던 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 38분 교각 5번과 6번 교각사이 길이 120m 중 중간상판(48m)이 힌지(hinge/pin)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 48m짜리 중간상판이 통째로 강물로 떨어졌습니다. 1975년 설계 당시, 북한의 청와대 습격사건 (1968년 1.21사태), 울진 공비침투 사건(1968년) 등 남북한이 군사적으로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던 상황을 고려하여 의정부에서 직통으로 내려오는 도로가 한강을 건너게 되는 다리여서 유사시 다리를 쉽게 절단할 수 있게 끔 2차대전시 독일의 교량공법이었던 게르버공법이 채택되었다고 합니다. 교각사이에 있는 상판 접합부위(힌지)의 양쪽 연결 핀만 뽑으면 다리를 쉽게 절단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이와 같은 구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두부 모 짤라 내듯 뚝 떨어졌던 것입니다.

사고전날 붕괴된 상판이 심하게 흔들렸다는 신고도 묵살되었고, 사고당일 아침 6시 성수대교를 통과하던 택시운전자가 상판 연결 이음새가 너무 벌어져 신고전화를 하기도 하였으나 서울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으며, 결국 사고가 아침 7시 38분에 터지게 되었습니다.

서울시가 1975년 성수대교를 설계할 당시 하루 8만대의 통행차량을 예상하고 설계하였으나 실제 하루 통행량은 16만대 이상이었고, 당시 2등급교인 DB-18로 설계하중이 32.4톤인 이 다리 위를 당시 성수대교 북단에 있던 삼표레미콘공장과 쌍용레미콘공장으로 골재를 반입하는 총중량 40톤 내지 50톤에 이르는 덤프트럭, 추레라 등의 과적차량이 하루 수백대가 10여년간 통과하여 이미 철강재 피로수명 200만회 (콘크리트 100만회)를 초과함으로써 피로파괴에 의한 붕괴는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고 분석한 한국건설기술연구원 구조연구실 박명석 박사의 지적을 인용하여 언론은 과적차량에 대한 안전관리 불이행이 사고원인의 주범이라고 보도했습니다. (연합뉴스 1994. 10. 21)

성수대교에 32.4톤을 초과하는 과적차량이 하루 400회 통과했다면 13년 8개월이면 200만회 (400회/일 x 365일 x 14년 = 2,044,000회) 에 달해 피로수명을 다하게 되며 이 경우 붕괴될 수 밖에 없다는 논리입니다. 아무리 시공과 제작을 완벽하게 했다고 하여도 피로수명을 다하면 붕괴를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도 신체를 혹사시키면 단명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성수대교는 붕괴된 5-6번 교각뿐만 아니라 인접 4-5번 교각에서도 H빔의 똑같은 부위 2곳에서 세로로 갈라지는 균열이 생겨났고, 3-4번 교각의 같은 부위에서도 균열이 생겨 상판을 겨우 지탱하고 있었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도 (한겨레신문 1994. 10. 28.자) 이는 과적차량에 의한 피로파괴가 성수대교 붕괴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이었음이 명백하다 할 것입니다.

여기에 교량의 유지보수 책임을 맡은 서울시가 교량의 상판 연결 부위를 힌지로 연결하는 게르버공법 교량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연결부재의 균열 및 이음새가 벌어진 것을 발견하고 벌어진 틈에다 까치발(브라켓)을 대로 덧대기 용접을 함으로써 힌지 역할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 상판 연결부위에 응력을 집중시키자 결국 균열이 급속히 진행되어 핀 연결부 수직재가 파단되면서 교각 사이이의 상판이 추락하는 사고가 생겨났던 것입니다.

위와 같이 설계하중을 초과하는 과적차량에 의한 피로수명이 다하여 준공 15년만에 붕괴된 성수대교를 놓고 마치 동아건설의 부실시공으로 인하여 붕괴된 것처럼 오해 받아 온 점을 말씀드립니다.







성수대교 사고와 관련하여 어제(2023. 4. 4) 추가로 올린 댓글 중 일부만 인용하여 보충합니다.

동아건설은 성수대교(1979)에 앞서 1975년 중동 UAE 아부다비 교량과 1976년 천호대교를 건설하였고, 그 후 독일의 디비닥(Dywidag) 공법으로 원효대교(1978∼1981) 등 수많은 교량을 건설한 회사입니다.

성수대교 설계 당시(1975년) 우리나라의 자동차 등록 대수는 총 18만대 (서울 8만대)였고, 사고 당시(1994년)에는 740만대 (서울 190만대)로 자동차 수가 설계 당시보다 41배나 증가하였고, 더욱이 사고 발생 1년 전인 1993년 성수-상계 강북구간의 동부간선도로가 개통되면서 교통량이 폭증하였음에도 서울시는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않고 그대로 방치한 결과 결국 사고가 터진 것입니다.

사고 당일(1994. 10. 21) 저녁 9시 KBS 뉴스는, 성수대교는 15년 전 당시로서는 독특한 공법으로 건설됐다. 기능보다는 미관에 중점을 두면서 교각 수를 줄여 예산도 절감한다는 취지에서 시작되었으나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다는 것이 약점이었다. 그 관리를 소홀히 한 것이 오늘의 참사로 이어졌다. (이윤성 앵커). 지난 70년대 말, 이미 건설돼 있던 10개의 다른 다리와는 달리 성수대교는 총길이가 1,160m인데 다리를 떠받치는 교각은 6개에 불과해 교각이 촘촘한 다른 다리에 비해 훨씬 돋보이며, 한강 다리 중에선 처음으로 모양새에 초점을 맞춰 이른바 ‘게르버 트러스’ 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이 공법은, 보통 5∼60m인 교각과 교각 사이의 거리를 120m로 늘린 대신 교각의 중간부분에 설치된 연결핀이 다리에 가해지는 하중을 교각에 전달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교각 수를 줄여 건설비용이 적게 들면서도 미관이 좋은 대신, 이음새 부분에 대한 관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KBS 김종명 기자)

사고 4일후 보도된 신문기사를 보면 성수대교는 사고 1년 6개월 전 긴급보수 지적을 보고 받고도 서울시가 묵살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서울시가 1993년 4월 동부건설사업소로부터 성수대교에 상판 이음새가 심하게 이탈돼 긴급보수가 필요하다는 보고를 받고도 묵살한 것으로 밝혀졌다. 성수대교 붕괴사건을 수사중인 검경합동수사본부는 서울시 도로시설과에 대한 압수수색에서 동부사업소가 서울시에 보낸 "성수대교 손상보고서"를 발견, 분석한 결과 이 같은 사실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0월 25일자).

사고 1년 6개월 전에 작성된 동부건설사업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성수대교는 2, 3, 4, 5번 교각 사이의 이음새 등 철구조물이 다른 다리보다 심하게 균열돼 있거나 이탈돼 보수공사를 위한 정밀진단이 요구된다고 기재돼있다. 또한 검찰은 사고 6개월 전인 1994년 4월에도 동부건설사업소 측이 성수대교를 안전점검 제1대상 시설물로 지정, 보수비로 875만원이 필요하다고 공문으로 건의했으나 서울시는 예산부터 확보하라며 묵살했다고 밝혔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0월 25일자).

검찰은 사고가 나기 8개월 전인 1994년 2월 24일 실시한 정기점검에서 점검자인 정천양씨가 성수대교의 이음쇠 등이 불량해 붕괴의 위험이 있다는 취지의 보고서를 제출했는데도 무려 8개월동안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성수대교 유지·관리업무를 맡아온 동부관리사업소는 1993년 8월부터 사고직전까지 교량 일일점검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안전에 이상이 없는 것처럼 일일점검 보고서를 작성, 서울시 측에 허위보고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습니다. (서울신문 1994. 10. 23.자)

세계 제2차대전 당시 독일은 교량을 통과할 수 있는 무게 25톤을 기준으로 전차(탱크)의 전체 무게를 제한하며, 전차 최대무게를 20톤급(BW)으로 제한했습니다. 독일이 1930∼1940년대 전쟁중에도 교량의 수명과 안전을 위하여 기준을 마련하고 있었는데 한국은 1970∼1990년대까지도 이러한 분야에 너무나 무지했습니다.

서울시는 성수대교 붕괴사고와 관련, 희생자 배상금 및 위로금으로 72억원, 다리 재시공비 780억원, 사고조사비 8억원 등 모두 8백60억여원을 지출했으며, 이를 보상받기 위해 1995년 6월 시공사 동아건설을 상대로 150억원의 구상금 및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는데, 5년만인 2000년 7월 21일 서울지법 민사합의12부(재판장 정장오)는 “동아건설은 서울시에게 21억원을 지급하라"며 서울시 일부승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동안 양측은 다리의 붕괴 원인이 `동아건설의 부실시공이 직접적인 원인이다', `서울시의 관리 소홀이 직접적인 붕괴 원인이다' 라며 맞섰으며 1996년부터는 양측의 사고책임을 규명할 형사소송의 확정판결이 날 때까지 2년간 재판이 중단됐었습니다.

서울시가 경간이 120m인 교각 사이에 중간상판의 연결핀(힌지)만 손상되면 두모 모 짤라지듯 교량이 뚝 떨어지게 설계된 게르버공법에 대한 개념 없이, 사고 발생 1년 6개월 전 상판 이음새가 심하게 이탈되고 교각 2, 3, 4, 5번 사이의 이음새 철구조물이 심하게 균열되어 있음을 발견하고도, 사고 8개월 전 정기점검에서 성수대교의 이음쇠 등이 불량해 붕괴의 위험이 있다는 취지의 보고를 받고도, 또한 사고 1년 전 동부간선도로가 개통되면서 교통량이 폭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대책없이 방치하다가 사고가 난 책임을 15년 전에 건설한 시공사에게 부실시공으로 붕괴사고가 일어난 것이라며 그 책임을 뒤집어씌우려고 노력한 행위는 타당하지 않습니다. 성수대교 붕괴사고의 진실이 왜곡돼서는 안 된다고 여겨져 작성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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